태권도 역사의 진실 "전설을 넘어 실체적 역사로" '태권도인 입장에서 본 택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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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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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6-05-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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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역사의 진실 "전설을 넘어 실체적 역사로" '태권도인 입장에서 본 택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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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nyeo4993님의 댓글
@hoonyeo4993 작성일
몇가지 헛점에 대해 이야기 드리자면 홍길동의 경우는 조선 감옥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홍가와라가 홍길동이라고 보기엔 무리라는 학설 기사도 있던걸로 압니다.
그리고 류큐열도는 동남아 남중국 대만 등과 더 가까워 17 18세기 무렵은 사쓰마와 남중국 영향을 접 받았다고 가라테를 설명하는 일본 내각부 사이트에서도 언급이 되었죠
또한 일본 사쓰마에 조공을 바치러 가던 류큐인들이 표류를 해 토사에 흘러들어가는데 그때 1750년대 중국 사신 공상군의 언급과 남권 전수가 언급됩니다. 테의 구체적 사료 언급중 하나고 무엇보다 무덕관에서 1960년대 당수도를 배운 척 노리스와 팻 존슨이 세운 아메리칸 당수도 측에서도 남중국 무술의 류큐 유입이 가라테로 보더군요.
아메리칸 당수도 측에서 무술감독한 한국 태권도가 빌런으로 나오는 가라테키드(코브라카이) 에서도 대놓고 일본과 대항하려 쓰인 오키나와 무술이라며 중국에서 들어왔다 설명도 하구요. 1960년대 주한 미군들 한테 까지도 중국발 무술이라는 인식이 있는듯 합니다
금오님의 댓글
금오
[답변] 태권도 고대사 재해석에 대한 질문(반론?)에 대하여
안녕하십니까, 본 내용을 각론 한 신성환 관장입니다. 먼저 필자가 제시한 '태권도 고대사 재해석'가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반론을 제기해 주신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구독자 @hoonyeo4993 께서 지적하신 부분들은 태권도 근대사 및 고대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쟁점들입니다. 이에 대해 제가 인지하고 있는 사료적 근거와 가설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답변해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반론), 홍길동의 실존과 '홍가와라' 이동설에 대하여 답변합니다.
홍길동이 조선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학설과 홍가와라(홍길동) 설에 대한 상충되는 비판적 내용이 존재한다는 점은 필자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길동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현재까지도 역사적 미확인 상태입니다. 옥사설 외에도 사적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다른 행적들이 존재합니다.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필자가 이 가설을 주장하는 핵심은 “기존의 태권도 역사가 가졌던 '근거 없는 억지 끼워 맞추기'식 서술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역사적 기록과 개연성에 비추어 우리 무예의 뿌리를 설명해 보자는 것”즉 재정립 하자는 것입니다.
필자가 주목하는 ‘홍길동 전파’ 가설적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1440년 전라도 장성 출생 후, 경국대전 반포로 인해 서얼의 길을 포기하고 의적 활동을 시작했고 김천 황악산 학조대사로부터 병법과 무술(수벽치기)을 전수받았다는 것입니다. 1500년(연산군 6년), 무오사화 이후 민심 수습을 위한 대사면령 과정에서 홍길동 집단이 자수 형식을 빌려 체포된 후 남해 유배형을 거쳐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에 정착했다는 기록에 근거합니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이를 확정적 사실로 못 박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사료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태권도 고대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의미한 가설”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둘째, 류큐 무술의 남중국 영향설과 시기적 선후 관계입니다. 제기하신 류큐 열도와 남중국 무술(남권 등)의 연관성, 그리고 척 노리스 등 현대 무술인들의 견해 또한 근대사에서 설왕설래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주장(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술의 뿌리와 민족 정서(DNA)'에 관한 것입니다. @hoonyeo4993께서 언급하신 중국 무술의 유입(공상군, 진원빈 등)은 주로 17~18세기에 유입된 것으로 기록되어집니다. 그러나 필자의 가설에 따르면, 홍길동 일행에 의해 조선의 문화와 무예(병법)가 전해진 것은 이보다 “100년 이상 앞선 150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부연하면 금무(禁武) 정책 이전에 전레 된 것입니다. 1609년 사쓰마 번의 침공과 금무 정책에 맞서 맨손 격투술이 발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조선의 무예적 전이 즉 문화전례가 이뤄졌다는(형성되었다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가설의 신빙성은 시기적 선후 관계를 고려할 때, 홍길동 가설은 단순한 전래설보다 우리 무예의 독자적 뿌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더 깊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 태권도의 정체성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시작된 민족의 DNA가 내제된 완성체인 현재 태권도에서 과거 가라테(당수)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로 태권도가 근대기에 가라테를 모체로 시작되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필자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태권도가 우리의 전통무예이기 위해서는, 비록 가라테를 모체로 현대화되었을지라도 그 내면에는 우리 민족의 DNA가 내재된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고대사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홍길동 전파” 가설입니다. 이 주장의 핵심입니다.
단순히 "우리 것이니까 우리 무술이다"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역사적 기록과 가설을 통해 논리적인 뿌리를 정립하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짧은 글로는 반론(질문?)에 답변 드리는 데 한계가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라이브 방송'을 통해 이러한 쟁점들을 놓고 가감 없이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참고로 질문한 내용은 아니지만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가라테의 명칭 변천과 한국 전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표현)하면, 가라테라는 명칭은 1906년 하나기 쵸모가 '공수(空手)'를 처음 표기했으나, 주로 '당수(唐手)'로 불리다 1921년 후나고시 기찐에 의해 통일되고 보급되었습니다.
이후 1936년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중국 색을 빼기 위해 '공수'로 통일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라테 보급은 1944년 청도관 이원국을 필두로 노병직, 전상섭, 윤병인, 최홍희 등 일본 유학파들이 귀국 후 보급한 것이 현대 태권도의 시작점이 된 근대사임을 정의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종호님의 댓글
김종호 작성일
멋집니다. 품위가 있습니다. 9단 고단자로서의 권위를 봅니다. 9단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성환 관장님 굳입니다. 존경합니다. 질문하신 독자분도 대단합니다.
두분다 품위가 있습니다. 본 받을 만 합니다. 두분 고맙습니다.
금오님의 댓글
금오 작성일관장님 말씀 처럼 우리 태권도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할텐데요






